내 글이 안 읽힌다면 제목이 구려서다

2020. 4. 19. 19:10카테고리 없음

이젠 종이와 연필만으론 글이 잘 안 써진다. 기계의 힘이 필요하다.

책을 고를 때, 블로그를 볼 때, 신문을 읽을 때, 인터넷 뉴스를 볼 때 당신을 혹하게 하는 건 무엇입니까.

강렬한 사진일 수도, 세련된 디자인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제목이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제 제목에 낚인 것이겠지요. 

 

어렸을 때 일기는 그야말로 숙제였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밀린 일기의 날씨는 오롯이 기억의 몫이었고 내용은 에세이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까웠습니다. 방학숙제용일 경우 '상'이 목적이었으니까요. 열심히, 성실히는 하기 싫은데 상은 또 받고 싶은 '욕망 어린이'였던 게지요. 그리고 매일 이야깃거리가 있을 만큼 재미난 일상이 아니기도 했고요.

 

그럼 그 또래 아이들의 비슷한 작문 실력 가운데서 상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제목이었습니다. 제목이 없는 일기와 있는 일기 중 선생님의 눈길을 끌 수 있는 건 당연히 후자겠죠. 포털 뉴스 창에 제목이 아닌 기사의 첫 줄이 목록으로 쭉 나열돼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뉴스를 취사선택 하는 데 직관은 사라지고 다 읽어야 하는 품이 들겠죠.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일단 제목이 있는 일기들을 먼저 읽고 후보로 선택했을 겁니다. 

그럼 다음 단계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제목이 있는 일기들 중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겠지요.

 

'엄마 아빠가 싸운 날'

'아빠는 엄마한테 왜 그럴까'

두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어떤 글을 읽으시겠습니까? 부부는 고로 싸우는 존재입니다. 선생님이 기혼이든 비혼이든 싸웠다는 내용에 호기심이 생길 리가 없지요. 두 번째 제목은 '뭘 어쨌길래'라는 궁금증이 작동하게 만듭니다. 

 

'사랑스러운 우리 동생'

'미운 우리 동생'

둘 중 어떤 것에 끌리십니까. '미운 우리 새끼'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언뜻 떠오르기도 하는 두 번째 제목이 더 읽고 싶게 만들지 않는지요. 사랑이 충만한, 세상이 아름답기만 한 사람이라면 첫 번째 제목에 더 끌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뭔가 사연이 있을 거 같은 내용을 사람들은 더 궁금해 하지요.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명제에서 벗어나니까요. 

 

'너무 적은 내 용돈'

'내 용돈 100원, 오늘도 난...'

둘 다 용돈이 적다는 건 같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제목은 액수가 적혀 있지요. 제목은 한 줄 승부인데 구체성이 들어가면 전투력이 상승합니다. 두루뭉술한 거보다 뇌리에 확 박히거든요.

 

제목은 본문을 요약하는 기능도 있지만, 무엇보다 본문을 읽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애써 쓴 장문의 글이 한 줄 제목 떄문에 읽히지 않는다면 억울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낚시를 위한 제목은 역풍을 부른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지점입니다.

온라인 속을 유랑하다 낚여서 실망했던 경험이 누구나 있지 않습니까. 앞서 이야기한 것들은 제목에서 유발한 궁금증을 해소해 줄 만큼 충분한 내용이 있다는 가정하에 유효합니다. 

내용의 부실함을 제목으로 채우려 하는 건, 일종의 자기 모순에 가깝거든요. 

 

이 글의 제목이 담지 못한 말도 그것입니다. 

'내 글이 안 읽힌다면 제목이 구려서다 (아니면 내용이 별로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