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펼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2021. 4. 12. 00:21카테고리 없음

"누가 신문을 보냐"는 시대를 살고 있다. 

독자 수 1등을 자랑하는 일간지가 부수 조작을 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틀린 말도 아니긴하다.

 

그럼에도 지면 편집을 왜 하냐면, 뉴스를 둘러싼 '의미'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험'은 왜 꼭 온라인어야 할까. 신문은 안 되나. 

뉴스를 관통한 레이아웃이, 뉴스를 씹어먹은 제목이 주는 감흥은 '새롭다'보다 백배의 효용가치가 있는데 말이다.  

 

아래는 편집기자협회 '편집상' 창고에서 건진 '신문의 존재 이유들'이다.

 

 

 

# 나는 배드민턴 선수입니다. 다른 건 휠체어뿐입니다

온라인에 이 기사가 떴다면 난 클릭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제목이지만 뻔한 얘기다.

지면으로 옮겨 담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한 장의 사진을 둘로 나눴다. 장애를 알 수 없는 상반신 사진과 제목, 이어지는 휠체어 사진과 다른 건 이것뿐이라는 설명. 뉴스를 그저 정리하는 게 아니라 의미를 부여했고, 그걸 잘 구현했다.  

아무리 멋드러진 말이라도, 감동은 강제당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르지만, 결국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 우리가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길

비움으로 채워낸 지면이다. 이 시도 자체는 새롭지 않다. 외국신문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어느 지점에서는 글의 흐름을 쫓아야 하는 수고스러움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끌릴까. 왜 읽어보고 싶을까. 

여백의 실루엣이 보여주는 '세월호'는 세월호라는 세 글자보다 강하다. 뉴스에도 감정이 있다. 분위기가 있다. 어쩌면 그걸 전달하는 게 편집이다. 

 

 

#이 많은 눈앞에서 숨을 수 있겠는가

블랙은 세련된 강렬함이 있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으되 얼굴이 드러나는 투명한 손. 아이디어가 좋았고, 그걸 구현한 디자인 기자의 실력이 느껴지는 지면이다. 그리고 이미지와 호응하는 제목. '숨을 수 있겠는가'

검은 바탕에 흰 글자는 분명 눈에 띤다. 그러나 그 크기가 클 때의 얘기다. 제목만 있는 포스터의 경우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사가 있는 신문지면이다. 편집의 1차적 목적은 기사를 읽도록 끌어당기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검은 바탕에 흰 본문은 실제로 읽어보면 가독성이 매우 떨어진다. 강렬함으로 눈을 붙들었으나 읽다가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든다면, 그 편집은 절반의 성공이다.   

 

 

# 굿바이, 캡틴

사진과 제목은 어쩔 수 없이 영혼의 단짝이다. 둘 사이가 친밀할수록, 서로를 대변할수록 그 편집은 '찰떡'이 된다. 주장의 표식을 만지고 있는 캡틴의 뒷모습. 그냥 박지성의 환한 얼굴이 클로즈업 된 사진이었다면, 지면이 주는 느낌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과감하면서도 필요한 것만 남긴 사진 트리밍 역시 기가 막히다. 

 

 

#중앙일보 경제면

 

편집자가 드러나는 편집이 좋은 편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편집이 '나다'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았다면 인정할만한 편집이란 생각을 하게 만든 지면들이다. 

 

 

같은 꾼의 입장에서 보면 품이 들지 않은 편집이다. 사진도 이미지 거리도 없다. 특별한 레이아웃도 없다. 하지만 사진과 이미지 없이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아이디어로 성공적인 지면을 만들어냈다. 검은색과 제목이 다했다. 

 

한 때 J리포트면은 독자로서 기다려지는 지면이었다. 내용을 불문하고 편집이 볼만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요소로 최대한의 의미 창출. 그게 J리포트의 장점이었다.

라면이 빨개져봤자 빨강은 아닐진데, 그걸 이렇게 배경에 색을 넣으면서 한방에 해결했다. 제목도 살리고 면발도 살리면서. 

 

돈. 경제면 단골 손님. 그만큼 돈 관련 이미지도 그래픽도 많다. 경제면의 역사에서 돈을 이보다 더 잘 활용한 지면이 있었을까. 지면을 들추어서 세종대왕님을 꺼내드리고 싶다. 내 지갑으로 들어오시라고. 

 

 

#위대하게 은밀하게

앞서 박지성 지면을 꼽은 이유와 같다. 사진의 힘. 제목의 힘. 그 둘의 힘. 사진의 절반을 어둡게 처리한 센스. 삼성 로고와 회장님 얼굴로는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함과 은밀함. 이 두 가지 느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단언컨데 없다. 

 

 

# 남북, 분단을 넘다

 

신문의 앞과 뒤. 대판을 더 대판스럽게 활용한 편집. 연결 자체가 첫 시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가치있는 지면 구성이다. 

역사적 순간의 흐르는 움직임을 한 장면으로 박제해야하는 작업. 북은 남으로, 남은 북으로 그렇게 의미있는 두 장면을 앞과 뒤라는 변주로 지루하지 않게 모두 담아냈다. 모든 신문사가 동일한 재료로 요리를 했는데, 그 맛은 다 다른. 그게 편집자의 역량이고 편집의 맛이다. 

 

 

 #이 청춘의 절망, 그저 통증입니까

 

의견을 머금은 제목은 의도 전달 차원에서는 효과 만점이다.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도 그렇지?'라는 강요가 담긴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지닌 독자에게는 한없이 명쾌한 제목이고,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반발을 부르기 십상이다. 이 제목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단순 차용이 아니라 청년이 직면한 문제를 무게감 있게 패러디했다는 점에서 우악스럽지 않고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누구를 겨눴든 그 문제는 차치하고, 이 제목이 좋았던 건 1면 톱이었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도 이 제목은 동일하게 소비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목이 오피니언면에 실렸다면 주목도는 달라진다. 비중있는 종합일간지에서 1면의 머리에 올렸기 때문에 이 제목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이다. 뉴스에 중요도를 부여하는 것, 그게 신문의 레이아웃이다. 

 

 

#왜 당신은

제목에 욕심을 내야하는 경우가 있다. 첫번째는 기사 내용이 시덥잖을 때다. 어떻게 해야 이 기사를 그럴싸하게 보이게 할까. 두번째는 기사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때다. 어떻게 해야 이 기사가 담고 있는 것을 한 줄로 전달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기사는 두번째였을 것이다. 내용을 줄줄이 언급하는 제목을 달 수도 있었을 텐데, 편집자는 같은 질문의 반복으로 명확하게 정리를 해냈다. 

 

'왜 당신은 다른 이의 삶이 안중에 없는가

왜 당신은 다른 이의 믿음이 틀렸다 하는가'

 

'기독교 독선 꼬집는 두 신작'을 십자가 형상의 레이아웃 속에 넣고, 울림이 있는 제목으로 각각의 포인트를 짚어냈다. 

 

저 제목에서 자유로울 자 누구인가.

이 지면을 펼치는 순간 읽지 않을 자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