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27. 23:22ㆍ카테고리 없음
사람 맘이 뭔가를 못하게 되면 더 하고 싶어진다.
여행이 그렇다. 시간이 있을 땐 돈이 없고, 돈이 있을 땐 시간이 없다.
지금은, 둘 다 있다한들 코로나로 해외여행은 그저 꿈이다.
해외여행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던 시절, "기내식 먹고 싶다"는 선배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얼마나 맛있길래' 정도로 해석했던 거 같다.
훗날 눈앞에 기내식이 펼쳐졌을 때 난 실망을 금치 못했다. 구름 위에서 여행의 설렘을 맛보고 싶다는 이야기였음을 그렇게 깨쳤다.
혼자서 열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 본 건 뉴욕행이 처음이었다. 영어에 능통하지 못한 내가 그곳을 택한 건 그저 '오기'였을까. (이년 뒤 역시 '영알못'인 채로 런던행에 몸을 실었으니 오기가 맞지 싶다.)
입국 심사가 입사 면접보다 떨릴 줄이야.
뭐하러 왔냐, 누구랑 왔냐, 여기 아는 사람이 있냐까지는 토익 리스닝을 치르는 심정으로 잘 듣고 대답했다. 그런데 걱정하던 'Why'가 등장하고 말았다. '왜 여자 혼자, 것도 일주일씩이나 뉴욕에 있냐'니.
관광지 몇 곳을 대며 그저 여행할 거라 답했다. 그의 표정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몸을 의자 뒤로 한껏 기대며 나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자기네 나라에 돈 쓰러 왔다는데 뭐가 이리도 고압적이야.
일각이 여삼추같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으로 패키지 여행을 다녀온 부모님이 어디론가 불려가서 한참을 붙들려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난 가이드도 없는데... 그때부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쉬운 단어도 뇌를 거치지 않고 흘러 나갔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날 빤히 쳐다봤다.
어쩌지, 어쩌지.
궁지에 몰리니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마침 타고 간 비행기가 국적기였다. 내 뒤에 줄을 선 일행이 한국사람이었다.
"저기요~저 좀 도와주세요" 거의 울먹였던 거 같다. 삼십대 후반이나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고맙게도 얼른 다가와 주었다.
자세를 고쳐앉은 심사관이 그 남자에게 물었다. "이 여자 하는 일이 뭐냐" "결혼은?" "아이는?"
그 말은 또 들리더라는. 졸지에 통역을 맡은 그 남자에게 일일이 답하고 있는 내가 참 모양빠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말이다.
그렇게 지옥문을 통과한 나는 거의 절을 하다시피 인사를 하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 아침, 숙소를 막 나섰는데 누가 아는 체를 했다. 맨해튼 중심도 아니고 변두리였는데 어제의 은인과 그 일행을 마주친 것이다. 이런 우연이, 무지 반가웠다. 명함을 교환했어야 하는데, 연신 고마웠다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한국 돌아가서 밥 한끼 대접할게요' 왜 그 말을 못했냐고. 바보같이.
여행은 그렇게 항상 무언가를 남긴다. 크고 높고 멋진 건 찰나의 감흥이지만, 그 걸 보기까지 겪게 되는 과정의 시행착오들은 오래도록 기억된다.
그래서 떠나고, 돌아오고 또 떠나는 게 아닐까.
여행면 편집의 묘미는 사진을 과감하게 쓸 수 있다는 데 있다.
기본적으로 사진이 좋기도 하거니와, 여행의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엔 백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여기 떠나고 싶게 만드는 '트레블' 지면이 있다. 코로나가 없던 9~10년 전 추천 여행지다.
날짜를 가리고 보면, 오늘자 신문에 실려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멋진 지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