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번 말고 학번

2020. 5. 31. 23:56카테고리 없음

달콤 쌉싸래한 서울의 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는 '99즈' 5인방이 나온다. 그들에겐 대학시절 같은 밴드의 멤버였다는 공통의 추억이 있다.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잘 스며들었던 건 이들의 오래된 우정이 맛깔나게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옛 친구, 이들과의 추억. 살다보니,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니 멀어져 있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갈증'이 일었다. 내 청춘의 한 페이지 어딘가에 있었을,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느 날, 오랜만에 학교 후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언니~대응연 99선배들이 서울 있는 사람들 한번 모이자는데 같이 갈래요?"

 

실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대응연이라니. 전국대학교응원단연합의 줄임말인데 지방대 중심의 친목단체였다. 서로의 학교 축제나 응원제 때 찬조 공연을 하고 1박2일로 거나하게 뒤풀이를 하던. 

갑자기 심장이 콩닥댔다. 그런데 문제는 모이자고 한 남자 99 셋 다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거였다. 군대 때문에 활동시기가 겹치지 않았다. 내게 문자를 보낸 후배는 02학번이라 그들을 알았던 거고. 

낯선 이가 주는 설렘보다 익숙한 이들과의 편함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고민이 됐다. 

 

그렇게 얼떨결에 카톡 방에 초대가 됐고 다섯으로 시작된 모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덟이 됐다. 

 

"00대 00학번 누구입니다"

이런 인사, 실로 오랜만이다. 학번보다 사번이 익숙해진 지 이미 오랜데, 다시 신입생으로 돌아간 듯 긴장되고 설렜다.  

 

코로나 때문에 한 달 뒤로 날을 잡았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허리에 손을 얹고 목청껏 "안녕하십니까! 00대 00응원단 00기 000입니다!" 이런 인사를 해야하는 거 아니냐며 우스개 소리로 서로를 반겼다. 

모른다 생각했는데 얼굴을 보다 보니 "본 것 같다"며 옛 기억들이 소환됐고, 누구의 누구 이런 식으로 연결고리를 찾다보니 어색함은 금세 사라졌다. 

신입생 때 맞아가며 연습한 얘기, 어느 학교 진상 선배 이야기 등 그야말로 추억은 방울방울이었다. 

 

자연스레 그때 이야기에서 지금의 이야기로 흘렀다. 

누군가는 코로나로 사업이 힘들다 했고, 누군가는 구조조정 통보를 받은 동료를 달래다 왔다고 했다. 

누군가는 두 아이를 둔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풀어놨고, 신혼인 누군가는 아내 몰래 나왔다며 웃음을 줬다. 

이 와중에도 순간 풋풋했고, 순간 짠했으며, 순간 벅차올랐다.    

 

아직도 '그대에게'를 들으면 심장이 쿵쾅댄다는 그들. 강산이 두 번쯤 변하고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어떤 것에 미쳤던 그 마음만큼은 여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날 서울의 밤공기는 여느 오월의 그것보다 더 달콤했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애틋한 것 같다.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짝사랑하던 모 학교 단장의 풀어진 리본을 용기내 매어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