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2020. 7. 12. 15:24카테고리 없음

구내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 길. 신문도, 세상도 많은 것이 변했지만 낡은 창문 속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어릴 적 우리 집엔 항상 신문이 있었다.

집집마다 신문을 많이 보던 시대이기도 했고, 아버지 친구분이 신문 지국 일을 하셔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연이 있기도 했다. 

그분이 다루는 신문이 바뀔 때마다 집에 배달되는 신문의 제호도 바뀌었다. 경향신문이 오래 배달되다가 한국일보로 바뀌었고 어느 순간 동아일보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중앙일보와 조선일보를 보던 때도 있었던 듯 싶다. 

(고시원을 하셨던 원주 할머니집에 가면 서울신문이 있었다. 각종 시험 공고문은 고이 찢겨 벽에 붙어있고.)

 

아니라 하시지만 당시 엄마 아버지는 신문의 색깔에 따라 당신들의 정치색을 바꾸셨던 것 같다. 평범한 필부필부인 두 분은 언론이 하는 말을 그만큼 신뢰하셨던 것일 테고. 지금은 색이 너무 뚜렷하셔서 뜻에 반하는 말을 했다간 혼나기 일쑤다. 그렇게 정치를 몰라서 어쩌냐고.

 

중학교 방학숙제 중에 사설 베껴쓰기가 있었다. 사설이란 게 내용도 내용이지만 필력이 없으면 쓸 수 없기에 글쓰기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보탬이 됐었다. 그리고 예전 신문엔 한자가 참 많았다. 이 역시 한문 수업시간에 자신감으로 보답을 하더라는. 

 

억지로 봐야했던 신문 말고, 경향신문 별지로 따라오는 '매거진X'는 기다려지는 신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이른 아침 대문을 열고 싶게 만들었던. 

뉴스를 몰랐고 편집은 더더욱 몰랐지만, 읽는 맛이 있었고 보는 맛이 있었다. 물론 방송 연예 기사 이런 쪽에 주로 혹했겠지만 말이다. 

 

내가 입사했을 때 '매거진X'는 '경향2'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말 섹션 '그 후'로 이름을 바꿨다. 

 

받침의 유무에 따라 글자 키가 다른 한겨레의 명조체를 좋아했다. 모든 면의 제목과 본문이 하나의 서체였다. 제호를 가리고 봐도 그 신문임을 알게 하는,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자신만이 가진 무엇. 한겨레가 글자체를 남들과 같은 걸로 바꿨을 때 참 아쉬웠다. 

 

마찬가지로 '매거진X'라는 경향신문만의 '무엇'은 이름을 바꿈으로써 매력을 잃었다. 

 

'그 후' 때 섹션팀에서 일을 했다. 화려한 레이아웃에 목마르던 시절. 선배들이 편집한 지면은 좋은 교과서였다. 당시 나도 흉내를 낸다고 냈는데 지금 다시 보니 독자께 송구한 마음이 든다. 

 

화살표를 쫓고 그 흐름대로 읽게 하는 것. 친절과 불친절 사이 그 어디쯤. 

 

 

 

딱히 사진물이 없을 때, 먹먹하지 않은 지면을 만드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여백의 미, 이게 묘한 게 내로남불의 측면이 있다.

시원해 보이고 주목도를 높일 수도 있지만, 자칫 잘못 쓰면 '여백 = 지면 낭비'가 되기 때문이다.  

내 의도를 독자들이 알아줄 거라 생각하면 착각이다. 직관적으로 좋아야 좋은 거지 아무리 고매한 의도가 있다한들 분석, 해석이 들어가야 한다면 실패다. 

신문의 목적은 1차적으로 정보전달에 있지 '예술하자'는 아니니까.

 

그럼에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멋드러진 지면이 있다. 

 

십년도 넘은 지면이지만 촌스러움이 1도 없다. 본문 세번째 단의 높이로 불균형적인 균형을 이뤘다. 

 

 

기울어진 여백과 자동차 하나로 불황의 디트로이트를 적확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십여년이 지나 진짜 '그 후'를 알게된 지금. 유독 눈에 밟히는 지면들이 있었다.

 

 

두 번째 면 마지막 기사 '안희정 누구인가' 제목 뒤에 보이지 않는 괄호가 있는 듯 하다.

(10년 뒤 성폭력으로 감옥생활)

 

 

 

이 역시 두 번째 면 제목이 눈에 콕 박힌다. '생에 대한 불경'이라....

소제목 세 번째 줄 '내 인생의 훈장이라면 술을 좀 마셨다는 것인데....'에서 말줄임표 뒤에 왠지 많은 일들이 담겨져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사람 일은, 사람 속은 참 알 수 없는 것 같다. 

뉴스만 틀면 나오던 시장이 홀연히 영정사진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투표가 낡은 시대를 이겼다"던 그는 왜 시간이 흘러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