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와 불호, 그 속에 정답은 없다

2020. 6. 8. 21:12카테고리 없음

신문사의 특성상 항의전화를 종종 받는다. 대부분은 화가 나 있으며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 뒤 꾸짖음으로 마무리 짓는다. (마무리 지어주면 그나마 다행이기도...)  

대표전화로 걸려온 전화를 내용에 따라 관련 부서로 연결해 주는데 홈페이지, 온라인에서 봤다 이런 말이 나오면 무조건 모바일팀 당첨이다. 신문보다 폰이나 PC로 기사를 접하는 독자가 많아진 세상이니 당첨확률은 제법 높다. 

 

"선생님 말씀 감사하고요,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예전 옆자리 후배에게 배운 멘트다. 솔직히 다짜고짜 화부터 내고 자기 말만 옳다고 쏘아대는 사람에게 정중하고 싶진 않지만 빨리 끊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 중 하나다.   

 

며칠 전, 자리 전화가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은 내부 전화고 "따릉 따릉"은 외부 전화다. 짧은 울림에 순간 긴장했다. 편집부 복귀 이후엔 이런 전화를 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네~편집붑니다" 

"경향신문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아...'

첫 마디를 들으면 파악이 된다. 물으려는지, 요청하려는지, 따지려는지. 것도 아님 그냥 화풀이 하려는지. 

 

이분은 제목 때문에 화가 났다고 했다. (그래서 편집부로 전화를 돌려주신 듯 했다.) 민주당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왜 나무라는 제목을 달았냐는 것이다.

언론사마다 추구하고, 바라는 바가 있긴 하다. 그래서 조중동과 경향 한겨례 이런 식의 구분도 생겨난 거고.

하지만 혹여 내편이라고 하더라도 팔이 무조건 안으로 굽어서는 안 되는 게 언론이기도 하다.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쓴소리도 해야하고, 현상의 나열이 아닌 분석도 해야 한다. 

 

결국 수화기 너머로 절독하겠단 협박 아닌 협박을 들어야 했고, 난 AI처럼 "선생님 뜻, 충분히 알겠습니다"로 통화를 종료했다.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생산한 기사와 제목을 소비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니 뭐. 

제일 무서운 게 무관심이지 않은가.

 

내가 단 제목이 누군가의 감정을 일렁이게 한다면, 성공한 제목일까 실패한 제목일까. 솔직히 답은 없다.  

기막히게 좋은 제목이 기막힌 제목이 될 수도 있는, 편집의 세계는 그런 것이니까.  

 

편집기자 지망생 시절인 2007년 1월 어느 날, 동아일보 1면 제목을 보고 난 무릎을 쳤다.

高, 스톱.

 

고건 전 총리의 대선 불출마 선언을 다룬 기사의 제목이다. 유력 주자의 퇴장으로 '판'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있을 건 다 있는 세 자였고, '도박판'의 느낌도 담은 절묘한 제목이라 생각했다. 쉼표와 마침표의 역할도 더할나위 없었다. 

그 해 이 제목은 한국편집대상을 받았다. (상이 잘함의 절대적 척도는 아니다.)  

 

그런데, 입사 후 들은 선배들의 평은 달랐다. 가볍다, 무리수다 등.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편집의 세계에서 이 제목은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었다.  

 

'때론 풍광이 사는 것을 눈물나게 한다'

 

이 지면 역시 지망생 시절 내 맘을 훔친 제목이다. 동아일보 여행면이었는데 멋있으려고 쥐어짠 제목이 아니라 담담해서 더 와 닿았던. 내가 백수여서 그랬을까. 햇살, 바람, 구름 이런 것들에 위안을 받다가도 급 서러워지던 시절이었다.  

 

'누가 내 손을 잡아줄까'

 

절절한 사진이 있었고, 제목이 그 사진의 '말'이 됐다. 지면이 온라인과 차별화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온라인은 선택받기 전까지 한 줄 싸움이다. 기사를 열어야 그 속에 사진이 있다. 

지면은 사진과 제목을 동시에 노출한다. 그래서 가능한 제목이 있다. 그래서 줄 수 있는 감동이 있다. 

 

'강을 강 뜻대로 흐르게 하라'

 

4대강 논란이 한창이던 때다. 지면엔 레이아웃이란 게 있다. 이 한 줄로도 충분한 제목이지만 강 사진 일부를 단절시킨 아이디어로 제목의 힘을 열배는 더 확장시켰다. 보기 좋은 레이아웃을 그리는 건 어쩌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제목과 레이아웃이 시너지를 내게 하는 편집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그런 편집을 만났을 때 '꾼'이 아닌 독자로서 느끼는 쾌감이 있다. 

 

그래서 편집이 재밌고, 어렵다.

그래서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신문이 존재하길 바란다.